우리나라 격동의 현대사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낸 1987년 6월항쟁`과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불붙인 촛불시위`, `윤석열 대통령 탄핵반대 집회` 등은 국민저항권의 일환으로 역사에 남을 만한 사건이다. 1987년 6월항쟁은 대통령 직선제를 끌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호헌철폐` 등을 구호로 내건 6월 항쟁은 당시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가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이는 `6·29 선언`을 도출해 낸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그러나 6·29선언은 당시 전두환 정권의 치밀한 계산에 따른 것이라는 주장과 미국이 알게 모르게 개입했다는 반론도 나왔다. 전두환 정권은 직선제를 하더라도 자신들이 정권을 재창출할 수 있다고 보고 준비했다는 것이다.정일준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에 따르면 당시 전두환 정권은 경찰력만으로 시위를 진압할 수 없었던 상황인 데다 광주민주화운동의 경험으로 군대를 동원하기도 어려웠던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전두환 군사정권을 승인한 미국 역시 이러한 과정에서 한국 내 반미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전두환 정권에 평화적 방식으로 정권을 이양하라고 회유와 압력을 가했다. 정 교수는 이런 상황에서 전두환 정권이 차선책으로 6·29선언을 통해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고 밝혔다. 그는 제도권 야당이 6·29선언을 받아들인 것은 6월항쟁이 전두환 정권이 직선제를 받아들이게 할 만큼 강력했지만 정권을 타도하기에는 약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6월항쟁은 30년 뒤의 촛불집회와 비교되기도 한다. 2016년 10월 29일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위한 촛불집회가 처음으로 열렸다. 집회 참석자들은 `모이자! 분노하자! 내려와라`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후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촛불시위는 모두 20차례 펼쳐졌다. 2017년 3월 10일 20차 집회까지 누적 기준으로 총 1600만명을 돌파한 촛불집회는 유례없는 비폭력 평화 집회였다. 이는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새로운 페이지를 열었고, 2016년 12월 국회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안을 가결하는 원동력이 됐다는 지적이다. 헌법재판소는 2017년 3월 10일 탄핵심판 선고에서 만장일치로 박근혜의 탄핵 소추안을 인용해 박 대통령은 탄핵당했고, 2017년 5월 문재인 대통령이 탄생했다.촛불집회의 역사는 이전으로 올라간다.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해 벌어진 한·미 간 밀실 합의는 전국으로 촛불집회를 확산시켰다.촛불집회는 다수의 사람이 주로 야간에 광장 등의 옥외에서 어떠한 사안에 대해 항의나 추모의 목적으로 촛불을 들고 비폭력 평화적 시위의 방식으로 진행하는 집회를 가리킨다. 1992년 하이텔의 PC통신 유료화에 반발한 이용자들이 촛불을 들고 집회를 벌인 것이 첫 사례로 알려졌지만, 당시 사회적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2002년 6월 ‘효순이 미선이 사건’이 발생하면서 촛불집회는 본격화했다. 경기도 양주 지방도로에서 길을 가던 중학생인 효순이와 미선이가 주한 미군의 장갑차량에 깔려 그 자리에서 사망한 사건이었다. 이는 당시 개최 중이던 한·일 월드컵과 16대 대선 열기로 주목받지 못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추모 집회로 출발했다. 그러나 미군 법정이 장갑차 운전병에게 무죄 판결을 내리면서 반미 시위의 성격을 띠게 되면서 전국으로 확산된 가운데 한·미 간 외교적 갈등이 되기도 했다. 특히 과거의 폭력 시위가 아닌 평화적 시위의 형태로 국민적 지지를 받으면서 촛불집회가 한국의 대표적인 집회·시위 문화로 자리 잡게 됐다.다음 촛불집회는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에 반대하며 열렸다. 노 대통령은 열린우리당 지지 발언에 따른 선거법 위반이라는 이유로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초로 탄핵 소추당하는 대통령이 됐다. 그러나 분노한 것은 노 대통령과 지지자뿐 아니라 상당수 국민이었다. 많은 국민이 국회로 몰려들었고, 탄핵 소추된 대통령을 위해 "탄핵 무효"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와 촛불을 들었다.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서 덕수궁 대한문까지 촛불로 가득 찼고, 이러한 집회는 헌법재판소가 탄핵 소추안을 기각할 때까지 전국 각지로 이어졌다.지난해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선포 이후 윤 대통령 탄핵과 탄핵반대가 적대적 대결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윤 대통령은 현재 옥중에 갇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에 대한 지지율은 돌풍처럼 치솟았고, 예상하지 않았던 2030 세대가 뛰어들어 계엄령이 아닌 `계몽령`을 외치고 있다. 1987년 전국으로 번진 시위가 `6월항쟁`이라면 지금의 탄핵반대 집회는 `계몽집회`라고 할 수 있다. 최근 헌법재판소가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에 속도를 내는 가운데 전국 곳곳에서 윤 대통령 탄핵반대 집회가 열리고 있다. 헌재는 법적으로 탄핵 심판 시한을 180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도 헌재가 심리를 서두르고 있다. 최근 윤 대통령과 국민의힘 지지율이 급증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민심이 윤 대통령에게 우호적으로 변하기 때문으로 분석된다.실제로 윤 대통령이 기소된 후 맞은 첫 주말인 지난 1일 서울 광화문과 헌법재판소 앞, 여의도 광장, 부산역 앞을 비롯해 대구 대전 인천 전주 포항 춘천 세종 등에는 수천수십만 명의 인파가 집결했다. 이들은 "윤석열을 석방하고 이재명을 구속하라" "헌법재판소 폐지하라" "헌법재판관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윤 대통령 탄핵의 부당함을 호소했다.이는 마치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전국적으로 집회·시위가 확산된 1987년 6월항쟁을 연상케 하고 있다. 당시 6월항쟁은 학생뿐 아니라 30대~40대 화이트칼라 직장인들, 속칭 `넥타이부대`가 대거 참여하면서 직선제 개헌을 끌어냈다. 2030 세대는 물론 50~80대 등 남녀노소가 골고루 동참하는 이번 탄핵반대 집회는 과연 윤 대통령 탄핵 기각(각하)이란 목적을 이뤄낼지 귀추가 주목된다. 이들은 헌재가 윤 대통령의 탄핵을 밀어붙이기 위해 사회주의 좌익 혁명을 꿈꾸고 있는 우리법연구회 가운데서도 가장 왼쪽에 있다는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과 좌편향적인 마은혁 헌법재판관 임명 관련 선고를 강행하려 하자 저들에게 나라를 맡길 수 없다는 입장이다.바로 `국민저항권`이 발동하고 있다. 저항권(抵抗權)이란 국가권력에 의하여 헌법의 기본원리에 대한 중대한 침해가 행하여지고 그 침해가 헌법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것으로서 다른 합법적인 구제수단으로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때 마지막 헌법 보호 수단이자 기본권 보장 최후의 수단으로서 국민이 자기의 권리,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실력으로 저항하는 권리다.전통적으로 저항권 행사의 주체는 국민이며 정당도 주체가 될 수 있다. 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는 주체가 될 수 없는데 이유는 그건 내란 내지 쿠데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대한민국에서는 저항권을 자연권으로 보는 게 다수설이다. 헌법에는 저항권에 대한 명문규정은 없지만 헌법 전문의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는 문언을, 헌법상 저항권 인정의 근거로 보는 시각도 있다. 다음은 헌재에서 명문화한 저항권의 조건이다.저항권은 공권력의 행사자가 민주적 기본질서를 침해하거나 파괴하려는 경우 이를 회복하기 위하여 국민이 공권력에 대하여 폭력·비폭력, 적극적·소극적으로 저항할 수 있다는 국민의 권리이자 헌법수호제도를 의미한다. 하지만 저항권은 공권력 행사에 대한 ‘실력적’ 저항이어서 그 본질상 질서교란의 위험이 수반된다. 따라서 저항권 행사에는 개별 헌법조항에 대한 단순한 위반이 아닌 민주적 기본질서라는 전체적 질서에 대한 중대한 침해가 있거나 이를 파괴하려는 시도가 있어야 하고, 이미 유효한 구제수단이 남아 있지 않아야 한다는 보충성의 요건이 적용된다. 또한 그 행사는 민주적 기본질서의 유지, 회복이라는 소극적인 목적에 그쳐야 하고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체제를 개혁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될 수 없다.이성원 대표기자 newsi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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